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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작기계 산역사 '남선기공'…화의에서 무차입까지

한미공작기계 2010. 2. 18. 11:09

한국 공작기계 산역사 '남선기공'…화의에서 무차입까지
[100년 바라보는 대덕기업③]'화의'탈출, 기술력·인재관리
'개인은 가도 기업은 남는다'초대 창업주 정신 60년 이어가

 ▲ 대전시 동구 읍내동에 위치한 남선기공, 우리나라 공작기계의 산증인이다.
 ⓒ2010 HelloDD.com
'개인은 가도 기업은 남는다.'
대전시 대덕구 읍내동에 위치한 남선기공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현판에 새겨진 말이다. 초대 대표인 고 손중만 회장이 강조한 남선기공의 기업 정신이 그대로 담겼다.

1950년 3월 1일에 시작돼 올해로 60주년을 맞는 남선기공. 남선기공은 우리나라 공작기계 역사의 산 증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90년도 후반 먹구름처럼 한꺼번에 밀려온 대리점 연쇄부도, 금융사고, 그리고 IMF. 상장을 앞둘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회사는 순식간에 회생 불능 회사로 전락했다. 결국 은행마저 등을 돌리면서 '화의'라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최악의 경영상태로 기업존폐의 기로에 섰던 남선기공이 다시 정상궤도에 오르기까지 숨막혔던 위기와 극복 전략을 들어봤다.

국내 최초로 공작기계 문열고 생산…기계 역사의 산증인

▲우리나라 기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인 '벽곡관'. 남선기공내에 마련돼 있다.
ⓒ2010 HelloDD.com
남선기공의 초대 대표인 고 손중만 회장은 어려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기계회사에서 조수처럼 일을 배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계제작 기술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해방이후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거의 폐허처럼 버려졌다. 고 손 회장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1950년 3월 회사를 인수해 '남선기공'이라 명하고 개업했다. 남선기공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공작기계를 생산한 업체다. 현재는 소형 범용밀링에서부터 최첨단 5축 머시닝센터에 이르기까지 국가 기간산업 발전에 필수적인 공작기계 제품을 생산한다.

"초대 회장의 장인정신은 특별했습니다. 공작기계 제작은 무엇보다 정밀함을 요구했으므로 조금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초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은 남선기공의 기술력이 각계의 인정을 받고 공작기계 회사로 확고히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남선기공에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공작기계.
ⓒ2010 HelloDD.com
회사는 75년 3월 현재의 소재지인 읍내동으로 이전했고 79년 일본과 미국에 선반 40대를 수출하는데 성공하는 등 우리나라 공작기계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

1982년부터는 모든 공정이 컴퓨터 수치 제어(CNC)화 되면서 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이후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 호주 등 세계 여러 국가에 수출길도 열렸다. 특히 다면다각기공기는 '특이제품 별량생산품'으로 이름 붙은 기계로 미국의 주문에 의해 93년 남선기공이 최초로 개발했다. 이는 복잡한 부품을 제작하는 기계로 전량 수출된다.

74년부터 회사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은 손종현 회장은 1987년 창업주 고 손중만 회장에 이어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는 기술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내수시장을 확보하며 강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손 회장이 회사 경영을 맡은 후 10 여년간 초고속 성장을 했다. 외형 20억에 불과했던 매출을 50억, 100억원, 그리고 마지막에는 연간 매출액 250억원이라는 놀라울 기록을 세우며 승승장구했다. 95년에는 증권회사에서 실사를 마치고 상장을 권유했을 정도다.

남선기공은 1991년 제1회 중소기업대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97년에는 100만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그러나 호사다마였을까. 상향곡선만 그리던 남선기공에 악재가 한꺼번에 겹쳤다. 대리점들의 연쇄 부도와 내부의 금융사고, 국가 전체에 닥친 IMF로 남선기공의 매출과 신뢰는 '제로'상태까지 떨어졌다.

95년말 회사의 부채는 229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수치에 이르렀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된 남선기공은 도산의 길로 끝없이 추락했다.

화의 신청에서 지금은 부채 비율 제로


▲2대 대표인 손종현 회장
ⓒ2010 HelloDD.com
"IMF이후 매출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밀링 머신은 신규 투자가 없으면 구매를 하지 않는데 그 당시 기업체 전반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개인은 가도 기업은 남는다는 초대 회장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기에 업종과 직원을 그대로 승계하는 조건으로 회사 매각을 추진했습니다. 처음에는 싱가포르의 엑셀사에 매각을 타진했죠."

하지만 추락하고 있는 회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상대 회사는 시간만 끌었다. 협상은 흐지부지해지고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화의'를 신청하고 회사를 원상복귀 시키기 위한 사투를 시작했다.

이런 깊은 수렁 속에서도 남선기공이 일관되게 유지해 온 것은 기술력과 인력관리다. 회사가 어려운 상태지만 인재를 아낄 줄 알았고 직원들의 고통을 최소화 하기 위해 임금 체불은 단 한차례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회사가 회생하기위해서는 기술력과 인재의 역할이 가장 클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의 규모를 줄이기 위해 구조조정은 어쩔 수 없었죠. 하지만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직원의 절반은 소사장제를 통한 아웃소싱을 주는 형태를 도입했습니다. 업무 분담도 고급 기술의 경우 직원들이 담당하고 일반 기술은 소사장들이 맡아 관리하면서 한데 어울려 밀링 머신을 생산해 냈습니다."

소사장제를 도입하고부터 경기가 어려울 때는 소사장 스스로 몸집을 줄였다가 좋아지면 바로 채용하는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남선기공은 회사 직원과 소사장 직원이 반반이다.

"매출이 이렇게 뛴 것은 소사장제를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즉 일한만큼 수익을 가져 갈 수 있는 건데 철저히 현금 중심 거래였기 때문에 회사나 판매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죠."

남선기공은 초창기 직영판매와 대리전판매제를 혼합해 운영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면서 대리점 판매제를 완전히 폐지시켰다. 그리고 회사 중심이 아닌 고객 중심의 영업과 수출에 주력했다. 직원들도 회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동부서주하며 발로 뛰었다.

또 철저한 현금거래도 남선기공이 화의 상태에서 도약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됐다. 온라인 통장에 현금입금이 확인 된 후에 제품을 출고하는 거래 방식을 적용했다.

이는 남선기공의 브랜드 이미지를 믿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도입한 거래 방식이었다. 그만큼 품질이 탁월하고 가격면에서 경쟁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남선기공의 매출은 급상승했다.

98년 54억이던 매출이 99년 160억원, 2000년 244억원. 기적에 가까운 매출 신장이다. 남선기공은 화의 상태였지만 은행 부채를 갚을 수 있게 됐다. 은행도 회사를 신뢰하며 신기술 개발 자금을 저리로 융자해주기로 했다. 마침내 2002년에는 '부채율 0%'의 기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당시 2대 대표이었던 손종현 회장은 자신이 활동하고 있던 이업종 교류회 회원들이 모인자리에서 남선기공의 완전 재기를 발표했고 회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현재 남선기공은 무차입경영으로 업계의 모범이 되며 장수기업의 표본이 되고 있다.

이후 남선기공은 순항을 거듭했다. 2004년 제34회 정밀기술진흥대회에서는 '5축 가공기(SPHNX-5X)'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다음해에는 제 2회 한국산업경제대상을 수상했다. 이는 대학에서 경제, 경영, 재정학을 전공하는 교수들과 국책연구소 박사급 연구원 약 1000여명으로 구성된 한국산업경제학회는 매년 우수경영자를 선정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

2008년에는 309억원의 매출로 전년대비 36%의 높은 매출신장을 달성했다. 올해 3월이면 60주년을 맞는 남선기공. 그동안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성장산업 분야로 진출을 모색 중이다. 이를 위해 전직원 해외 연수를 실시하고 해외 업황 분석 등 기술개발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해외 전시회를 통해 해외에서도 남선기공의 기술력을 인정받는다..